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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간도참변(間島慘變) -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이어지다

by 녹색글 2024. 6. 2.

항일무장독립투쟁사를 이야기한다면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3.1 운동을 시작으로 활발해진 항일무장투쟁과 독립운동의 의지를 초토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사건이다.

또한, 최근에 붉어진 홍범도 장군의 행적 논란을 이야기하려면 타임테이블을 살펴봐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오늘은 간도참변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과정과 참혹한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경신간도학살사건(庚申間島虐殺事件)

간도참변(間島慘變)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일본 군인들이 일으킨 만행으로,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경신간도학살사건(庚申間島虐殺事件)이라고 불린다. 참변이란 단어의 의미가 재난이나 재앙까지 포함되므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간도학살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1923년에 저질러진 일본의 만행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의 지명과는 다르다. 방송기자들이 얼마 전부터 관동을 간토라고 발음하며 보도하여 혼동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간단히 언급한다.)

 

3.1 운동과 항일무력투쟁

1919년 3.1 운동으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도 본격적인 항일무력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기 위한 양성기관이 많이 설립되었으며, 그렇게 양성된 독립군은 국경을 넘어 식민지 행정기관을 습격하고 타격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일본은 이러한 잦은 독립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토벌 작전을 시작하기로 한다. 그러나 만주 지역의 지형과 지리를 잘 아는 독립군과 조선인들의 저항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더 큰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 소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이라 불린다. 그러나 일본군이 만주 지역에 대규모로 침투하는 것은 대륙에서의 또 다른 긴장감을 야기할 수 있는 바 군대를 보낼 명분을 쌓기 위해 훈춘시에서 사건을 일으키기로 한다.

 

 

훈춘사건 [琿春事件(혼춘사건)]

1920년 9월 2일 새벽, 약 300여 명의 마적들이 훈춘시를 공격하여 약탈과 방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10월 2일에는 약 400여 명의 마적들이 훈춘시를 약탈하고 방화하며 살인을 일삼았다. 중국인 병사 70여 명과 한국인 7명이 살해당했으며 일본인도 9명이 살해당했다. 일본 총영사관도 소각되었지만, 미리 대피하여 인명 피해는 없었다. 일본은 당연히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만주로 들이겠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사실, 훈춘시에는 일본 총영사관과 경찰, 그리고 총독부 파견 경찰대까지 주둔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일제를 간도에 출병할 수 있도록 마적들을 매수해서 날조한 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대규모 토벌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의 대패

훈춘사변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는 '제국신민보호'라는 핑계로 일본군을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훈춘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열흘도 안되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는데 일본의 조선주둔군 제19·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인 제11·13·14사단, 만주파견군과 관동군 등에서 파견이 이루어졌으며 그 수는 총 2만 명의 병력이었다.

 

그리고 계획은 아래와 같았다.

 

  • 1단계 : 1개월 내 독립군 섬멸 및 근거지 제거
  • 2단계 : 그 후 1개월 이내에 잠복한 독립관련자들 색출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들은 이미 주둔지에서 빠져나와 깊은 산속이나 국경지대로 부대이동을 마쳤다. 그 뒤를 쫓던 일본군은 청산리에서 독립군 연합부대에게 크게 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독립군은 연해주로 이동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좌.청산리 대첩 그림    중앙.청산리대첩 후 찍은 사진(추정)    우.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는 일본군

 

일본군 재만조선인을 학살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연이어 대패하게 된 일본은 대규모병력으로도 독립군을 제거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항일무장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한다는 명분 아래 간도에서 1921년 4월까지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간도학살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걸쳐 이루어졌다.

 

  • 1단계 10월 14일~11월 20일 / 1차 토벌 - 무장독립운동기지로 인식되는 학교, 교회, 마을 수색
  • 2단계 11월 21일~12월 16일 / 잔당숙청 - 독립운동 마을과 독립운동기지의 반복수색
  • 3단계 12월 27일~1921년 5월 9일 / 경찰증가로 인한 무장력 강화, 친일세력육성

 

10월 9일부터 시작된 이 학살은 27일 동안 재만조선인을 3,469명을 학살했다. 남은 기간의 희생자까지 합친다면 얼마나 많은 조선인을 학살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엄청난 피해와 참혹한 학살 방법

상해임시정부 간도 파견원이 보고한 1920년 10월~11월 두 달간 통계는 아래와 같다. 이듬해 5월까지의 피해상황을 집계하지 않은 것을 감안해 보면 상상 이상의 피해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 인명피해: 피살 3,469명, 체포 170명
  • 건물피해: 민가 3,209개 동, 학교 36개교, 교회 14개소
  • 식량피해: 불탄 곡물 54,045 섬

 

스스로의 만행을 극도로 축소한 일본군의 자료를 살펴보면 한인 494명 살해, 민가 531개 동, 학교 25개교를 불태운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출처 동아일보

 

일본이 간도에서 벌인 학살극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증언자들은 차라리 총으로 살해된 것은 운이 좋은 것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화룡현(和龍縣) 장암동(獐巖洞)에서는 마을을 포위해 28명의 기독교인을 세워 놓고 소총 사격 연습의 과녁으로 만들었으며, ‘장암동 학살사건’ 기념비 측면에 새겨진 글귀에는 36명이 희생됐음을 밝히고 있다.

 

연길 의란구(依蘭溝)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을 몰살하고 울부짖는 4형제를 화마 속으로 밀어 넣어 태워 죽이기도 했다. 또한 연길현 와룡동(延吉縣臥龍洞)에 거주하는 교사를 붙잡아 얼굴 가죽을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내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는 일본군이 2~3세 아이를 창끝에 꿰어 고통으로 울부짖는 그 아이의 비명을 들으며 즐겼다는 증언도 있었다.

 

 

박은식이 기록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아래와 같이 참상을 기술하고 있다.

 

아아! 세계민족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소가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 자 있을 것이리오. 역대 전쟁사상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처럼 흉잔 포학한 자는 들은 적이 없다. …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있었던 일이겠는가. … 각처 촌락의 민가․교회․학교 및 양곡 수만석을 모두 불태웠다. 남녀노소를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매질하여 죽이고, 포박하여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발로 차서 죽이고, 찢어 죽이고, 생매장하고, 불에 태우고, 가마에 삶고, 해부하고, 코를 꿰고, 옆구리를 뚫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고, 눈을 파내고, 가죽을 벗기고, 허리를 베고, 사지를 못박고, 손발을 잘라서 인류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저들은 오락으로 삼아 하였다. 우리 동포는 혹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죽고, 혹은 부자가 함께 참륙당하고, 혹은 남편을 죽여 아내에게 보이며, 혹은 형을 죽여 아우에게 보이며, 혹은 상제(喪制)로 혼백(魂魄) 상자를 품고 난을 피하다가 형제가 함께 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산모가 기저귀에 싼 어린애를 품고 화를 피하다가 母子가 같이 명을 끊었다. 그 밖에 허다한 일은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박은식,《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海:維新社, 1920, 165~166쪽)


 

 장암동참안유지 비석 / 출처 좌. 에큐메니안    우. 서울경제

 

간도학살사건 후의 동향

독립군들은 1920년과 1921년에 걸쳐 연해주 달네레첸스크를 거쳐 자유시(自由市, Svobodny)로 이동했다. 이들은 소련 공산당이 항일투쟁에 협조하고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해 왔기 때문에 연합세력으로서 항일무력투쟁을 이어가고자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간도참변이라는 사건이 있었다는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 간도에서의 학살 사건 이후 간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일제에 순응하며 협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일본의 지배와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결국 간도학살사건 이후로 항일무장투쟁의 노선은 혼돈과 암흑 속으로 빠지게 된다.

 

 

출처 안동 MBC plus 유튜브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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