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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률)성(郑律成) 공원' 논란 - ② 그의 공산당 행적

by 녹색글 2023. 10. 24.

 

정율성 음악축제는 2015년부터 시작해 올해 2023년까지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점화된 논란 때문인지 올해 '2023 정율성 음악축제 광주 성악콩쿠르'는 비공개 행사로 진행되었다. 그만큼 민감하게 이번 논란에 대해 주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잘 진행되어 오던 음악제의 진행방식에도 영향을 미친 정율성에 관한 논란이 어디서 출발했는지에 대해 우선 알아보자. 정율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면 아래 글을 우선 읽어보시고 이번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정율성(郑律成) 공원' 논란 - ① 찬성 반대 전에 누구인지 알아보자

중국의 3대 음악가 중 1명으로 추앙받는 정율성(본명 정부은)이지만 왠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항일투쟁을 하다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간략한 역사적 사실만 아는 사람이 대다수일

green.parangul.com

 

정율성의 모든 논란의 출발 '공산당(共産黨)과 공산주의(共産主義)'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선의용대는 조선으로

정율성은 독립운동사에 뛰어든 용감한 독립군임에는 틀림없으나 공산당 이력이 발목을 잡는다. 하필 왜 독립군이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항일(抗日)'이 공통분모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더욱 효과적으로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보다는 마오쩌둥(毛泽东)의 공산당을 선택한 것이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와의 결별 이야기는 별도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팔로군의 지휘를 받게 되었으며 조선의용군은 북한으로의 입국 명령 등을 받으며 본격적인 중국 공산당의 역할 일부를 담당하게 된다. 이들 중에는 훗날 연안파(延安派)라고 불리는 정치집단을 결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때는 이미 남북이 분단된 상태였다.

 

 

북한에서의 행적

황해도위 선전부장을 비롯해서 평양의 조선보안대 부장 등 많은 활동을 하게 되며 조선인민군행진곡 등 30여 곡의 작품을 창작한다. 이때 만든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이후에 북한의 군가로 불리게 된다. 김일성의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받게 된 가운데 정율성은 4차례의 상장과 상금을 받게 된다.

 

평양국립음악대학 작곡부장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공화국 깃발이 바람에 흩날리네(共和國旗幟迎風飄揚), 조선인민유격대전가(朝鮮人民遊擊隊戰歌), 우리는 탱크부대(我們是坦克部隊), 전사의 맹세(戰士的誓言) 등을 작곡했다.

 

출처 연변라지오TV방송국 / 좌. 정율성과 조선혁명군정학교 학도들 우. 1948. 2. 8 북조선인민위원장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포상장

 

연안파(조선의용군) 숙청으로 인한 북한에서의 찬밥신세. 그 후 중국 공산당 가입

연안파(延安派)는 중국 옌안(延安)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항일운동을 펼친 조선의용군 출신들의 정치집단이다. 이 조직은 중국공산당의 후원으로 입북하게 된 이 조직은 훗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partisan) 파에 의해 숙청된다. 이때 제거되지 않은 정율성은 중국인 부인 정설송(丁雪松)과 함께 중국으로 입국한다. 그리고 그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며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도움으로 중국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좌. 연안파 우. 빨지산파

 

한국전쟁 발발과 북한으로의 재입국

1950년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난 후 평양까지 함락된 북한은 중국 쪽에 중국인민군 출병지원을 요청한다. 그 후 정율성은 1950년 12월에 중국인민지원군에 소속되어 다시 고국땅을 밟게 된다. 소위 '1.4 후퇴'라고 불리는 철수사건을 불러일으킨 중국군의 지원으로 공산군은 다시 서울을 점령하게 되고 이때 정율성도 서울까지 내려오게 된다.

 

이때 정율성은 폐허가 된 건물들을 뒤지며 조선궁정음악 악보 2부 18집의 고전악보를 찾아내 중국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정설송의 갑질로 약탈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둘 중 누가 어떤 경로로 가져갔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가 않다. 1996년 양국수교가 이루어지고 부인 정설송이 한국을 방문해 이 귀한 악보들을 반환했다.

 

좌. 출처 조선일보 / 1951. 1. 4 서울중앙청 건물 앞에서 춤 추며 자축하는 중공군  우. 출처 연변라지오TV / 폐허가 된 서울의 종로에서의 정율성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하다

1939년 공목을 찾아가 작사를 해줄 것을 요청하고 그해 '팔로군대합창'을 완성한다. 이 곡은 훗날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개명되고 1988년 7월 25일에 중앙군사위원회가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결정한다.

 

출처 샤트리나 유튜브채널

 

그 외 정율성의 작품 -  세계한민족문화대전 인용

정율성은 서정 가요, 군가, 합창곡, 동요, 오페라,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곡을 360여 곡을 작곡하였다. 그의 창작 활동을 시기 별로 요약해 보면 연안 시기에는 「연안 송」, 「연수 요」,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하였고, 북한 체류 시기에는 「조선 인민군 행진곡」, 「두만강」, 「동해 어부」 등의 곡을 작곡하였다. 마지막 시기는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 시기로서 「망부운(望夫雲)」(1957), 「설란(雪蘭)」(1963) 등의 오페라를 창작했다.

 

「우리는 행복해요」 등의 가곡과 모택동의 시에 곡을 쓴 작품들을 남겼다. 1939년에 작곡한 「연수 요」는 민요풍으로 작곡한 서정 가곡이다. 그는 중국의 민간 음악의 음조를 가곡 창작에 도입하였다. 「생산 요」는 6/8박자의 한국 민요풍의 선율, 리듬 위에 중국의 서북 지역 민간 음악의 선율과 잘 조화시켜 작곡한 곡이다. 정율성은 중국 현대 합창제의 개척자로서 약 60여 곡의 합창곡을 작곡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곡이 1939년에 작곡한 「팔로군 대합창」이다.

 

그는 북한에서 「두만강」(1946-1949), 「동해 어부」(1946-1949)등의 대형 작품을 창작하였고 100여 차례 공연을 갖기도 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 정율성은 아동들을 위한 동요를 작곡하였다. 동요 중에 애창곡은 「평화의 비둘기」(1952), 「우리는 행복해요」(1953) 등 많은 동요를 작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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