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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율성(郑律成) 공원' 논란 - ① 찬성 반대 전에 누구인지 알아보자

by 녹색글 2023. 10. 24.

 

중국의 3대 음악가 중 1명으로 추앙받는 정율성(본명 정부은)이지만 왠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항일투쟁을 하다 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간략한 역사적 사실만 아는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지금 광주에서는 그를 기리는 공원을 만들기 위한 사업이 진행 중이지만 어쩐지 잘 진행되어 오던 사업에 잡음이 끓기 시작했다. 정율성 기념공원 사업을 계속 진행해야 한다는 시민들과 반대한다는 시민으로 나뉘어 분열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005년 부터 줄곧 이어온 '정율성 음악제'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논란의 중심으로 뛰어들기 전에 정율성이 누구이고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먼저 알아봐야 할 것이다.

 

 

율성의 어린 시절

정율성은 1914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79번지)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정율성은 항일투쟁의 구심점으로 작용한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 광주 YMCA를 통해 음악을 지속적으로 접함과 동시에 항일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아버지 정해업은 한 때 유진벨이 1908년에 세운 수피아여학교에 교직으로 몸담기도 했다.

 

외삼촌으로는 광주 YMCA설립자이자 빈민구제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큰 외삼촌 최흥종 목사가 있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낸 최영욱 박사가 있다. 그리고 수피아여학교 교사이자 한국 YWCA 설립자 중 한 명인 김필례 등은 정율성이 음악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양림교회유진벨 선교사수피아홀
좌측부터 양림교회, 유진벨 선교사, 수피아홀

 

 

가족의 독립운동

큰형 정효룡은 3.1 운동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 선전원으로 활동하다 1년형을 선고받았고 둘째 정충룡도 큰형과 함께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항일무장투쟁 중에 사망을 하게 된다. 정부은의 큰누나 정봉은은 수피아여학교 음악교사였으며 매형인 박건웅 역시 의열단원이었으며 김원봉이 난징에 세운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수로 일하게 된다. 셋째 형인 정의은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정부은은 아버지 정해업이 사망한 후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으며 (2008년 모교인 신흥중학교는 부은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셋째 형 정의은을 따라 난징으로 건너가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는 정부은이 항일투쟁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는 때이며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되고 만다.

 

출처 오마이뉴스 / 천녕사(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 & 조선의용대 창설기념사진

 

부은(富恩)에서 율성(律成)으로

정부은은 난징에서 상하이까지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레닌그라드음대 출신 교수 크리노와(Krenowa)에게 사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운암 김성숙을 만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후로 이름을 율성(律成)으로 개명한다. "아름다운 소리선율(律)로 조국해방을 이룬다(成)"는 의미로 개명한 것이다. 이는 독립군에게 부를 군가가 없다는 유언과 함께 눈을 감은 아버지의 유언을 좇는 것이기도 했다.

 

운암 김성숙과 정율성의 매형인 박건웅 / 출처 사단법인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회

 

항일을 위해 손잡아야 하는 중국의 내전상황 (Chinese Civil War)

1930년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와 홍군을 이끌던 마오쩌둥(毛泽东)의 패권전쟁으로 인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당시 의열단은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항일투쟁을 이어나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홍군은 옌안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국민당이 항일투쟁에 힘을 쓰기보다는 공산당과의 투쟁에만 몰입하게 되면서 항일투사들의 고민은 커져갔다.

결국 항일투사들 중 많은 인원이 옌안으로 집결하면서 그곳을 항일투쟁의 본거지로 삼게 되며 1937년 가을에 정율성도 옌안으로 향하게 된다.

 

※국공;내전(國共內戰): 1927년 이후 중국공산당이 당시 중국의 중앙 정부였던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상대로 벌인 내란 혹은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중국 대륙의 패권을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

 

장제스와 마오쩌둥 그리고 국공내전(Chinese Civil War)

 

 

옌안송(延安頌)의 탄생

율성은 옌안에서 산베이 공학을 졸업한 후 루쉰예술학원에 입학하여 음악교육을 받았으며 이곳에서 인생작인 중국의 아리랑 '옌안송(延安頌)'을 만든다. 옌안송은 공산당 찬양이 아닌 옌안의 서정적 느낌의 가사와 함께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곡이다. 옌안은 중국 혁명의 성지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옌안송에 대한 중국인들의 남다른 애착이 있어 보인다.


그 후, 1939년에 팔로군행진곡을 포함한 '팔로군 대합창'을 작곡하게 되는데 팔로군행진곡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 때 중국 군인들이 즐겨 부른 곡이다. 훗날 이 곡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되기도 하지만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행사에 쓰이기도 했다.

 

출처 중국 CCTV

 

투쟁과 사랑

1937년에 옌안에서 정설송(丁雪松)을 만나 1941년 결혼을 하게 되고 딸인 정소제(鄭小提)를 낳는다. 그녀는 혁명가이자 중국공산당 당원이었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공산당 총리의 양녀이면서 비서를 지냈다. 훗날 여성으로는 최초로 네덜란드와 폴란드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정설송(丁雪松)은 한국전쟁에서 주둔할 때에는 서울의 주요 관공서를 다니면서 종묘제례약과 연례악 등 '조선궁정악보'들을 약탈해갔다고 한다. 그 후 1996년 양국 수교 후에 한국정부에 반환되었다고 한다.

 

정설송 정율성정율성 정설송

 

해방 후 38선 이북으로의 입국과 한국전쟁

정율성은 타이항산 등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는 등의 활동을 펼치다 비로소 옌안으로 돌아왔을 때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후 팔로군 본부는 조선의용군 모든 인원을 조선으로 입국할 것을 명령하게 되는데 정율성의 가족도 모두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다. 1945년에야 비로소 북한으로 입국을 하게 되며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을 했으며 12월에는 해주에 가서 조선로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활동한다. 이곳에서도 음악전문학교를 만들어 음악교육에 힘썼다.
또, 그 외에 조선인민군 구락부부장, 조선인민군 협주단 단장, 조선음악대학 작곡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동해어부 등을 작곡하였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한국전쟁 상황에서 정율성은 중국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1950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취득하였으나 중국공산당의 명령으로 다시 1950년 12월에 한국 전쟁에 파견되어 혁명활동을 하게 되며 1.4 후퇴 때에는 중공군 장교로서 서울에 주둔했다. 그리고 중공군이 퇴각하는 시점인 1951년 4월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로 베이징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園), 중앙악단(현 중국 국립 교향악단) 등 공산주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음악단체들에서 활동하게 된다.

 

 

문화대혁명기과 정율성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문화예술계에도 피바람이 불게 된다. 창작활동에 제한을 받게 되고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다. 중앙악단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줄곧 소수민족의 음악을 수집하고 공부를 해왔던 만큼 이 시기에도 자료수집에 전념했다. 정율성도 창작에 제한을 받고 핍박을 받았다는 의견도 있으나 문화대혁명기에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작품만 20편이 넘는다는 사실로 비추어 핍박을 받았다는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의 사망과 함께 문화대혁명이 사실상 종료되었으며 문화예술계에도 복권이 이루어졌다. 정율성 또한 그해 복권이 이루어졌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위한 연가와 중국공산당 창당 5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나 정율성은 그해 12월 7일 북경 근교에서 낚시를 하던 중 뇌출혈로 사망하여  중국의 '팔보산 혁명 공묘'에 묻혔다. 향년 62세.

 

※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 Cultural Revolution, Great Proletarian Cultural Revolution):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에서 진행된 대규모 정치 운동. 중국 공산당의 주도하에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하고, 중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또는 "부자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목표.
문화예술 창작활동이 제한되고 혁명과 사상을 주제로 한 작품만 생산해야 했던 사건.

 

좌측 어린 홍위병이 하얼빈 시장 리판우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  중앙 정율성 정설송 묘지 /  우측 모주석기념당에 안치되어 있는 마오쩌둥 시신

정율성 관련 자료

 

정율성 육성 - 메기의 추억

 

 

출처 박상후의 문명개화

 

 

출처 광주MBC 유튜브 채널 / 정율성,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한 음악가

 

출처 korean world 유튜브채널 / 조선영화 음악가 정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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